우리가 외면하는 삶의 진실
우리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만들어간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말이 주는 위안과 희망은 달콤합니다. 하지만 잠시 멈춰 서서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 당신이 가진 능력, 당신이 마주하는 기회와 제약들. 과연 모든 것이 당신의 순수한 선택이었을까요?
어쩌면 ‘운명’은 신비로운 점괘나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피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1. 부정할 수 없는 시작점의 힘: 당신은 선택하지 않았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만약 개나 고양이, 혹은 다른 생명체로 태어났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 즉 ‘견생’이나 ‘묘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부터가 거대한 운명의 갈림길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당신은 남성으로 태어났습니까, 여성으로 태어났습니까? 이 생물학적 구분만으로도 사회적 기대, 역할, 경험은 크게 달라집니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습니까? 풍요로운 선진국과 자원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의 출발선은 같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까? 부유한 가정의 아이와 가난한 가정의 아이가 누리는 기회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심지어 같은 개로 태어나더라도, 따뜻한 가정의 애완견이냐 비참한 환경의 식용견이냐에 따라 그 삶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우리가 단 하나도 선택하지 않은 이 ‘시작 조건’들이 우리 삶의 70~80%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타고난 DNA, 물려받은 기질, 외모, 지능, 건강 상태…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인생 경로의 방향과 폭을 강력하게 규정합니다. 이것이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2. 선택, 그리고 운명을 바꾸는 우연
물론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점심 메뉴를 고르고, 직업을 선택하고,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의 뇌는 마치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뇌는 타고난 기질(DNA)과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경험, 학습, 환경)를 바탕으로, 주어진 상황(입력)에 대해 가장 ‘적절해 보이는’ 혹은 ‘익숙한’ 반응(선택/출력)을 계산해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 지극히 복잡하고 고도화된 정보 처리 과정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원인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무(無)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 안에서의 최적화된 반응 경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삶에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도 존재합니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고, 끔찍한 사고나 예기치 못한 만남, 혹은 범죄 피해 등으로 인해 정해진 듯 보였던 삶의 경로가 완전히 뒤틀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우연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삶의 경로를 극적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마치 거대한 물줄기 속의 예기치 않은 소용돌이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태어날 때 주어진 조건들이 형성한 주된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3. 배고픔과 생존 본능: 우리는 왜 운명을 인지하지 못할까?
우리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배가 고프니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생존하라’는 강력한 명령이 DNA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 본능이 배고픔이라는 신호를 보내 행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이런 깊은 이유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선택과 감정에 집중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를 근본적으로 이끌고 있는 더 큰 힘, DNA에 각인되어 있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운명의 힘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4. 시지프스의 돌: 운명 속에서의 인간
이러한 운명론적 관점은 우리를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의 모습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신들에게 영원히 큰 돌을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돌은 정상에 닿기 직전 어김없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그는 또다시 묵묵히 돌을 밀어 올려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태어날 때 주어진 조건이라는 거대한 돌을, 정해진 삶의 경사면 위에서 평생 밀어 올리는 모습과 닮아 보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근본적인 운명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이 끝없는 형벌 속 시지프스에게서 비극이 아닌 다른 의미를 발견합니다. 시지프스는 자신의 운명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 부조리한 형벌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돌을 밀어 올리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며 운명에 저항합니다. 정상 도달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운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1%의 희망’의 본질일지도 모릅니다. 즉, 운명의 거대한 틀(굴러떨어지는 돌, 타고난 조건)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주어진 삶(돌)을 마주하고 밀어 올릴 것인가 하는 그 ‘자세’만큼은 우리의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운명을 인지하고 그 안에서 의식적으로 분투하는 것, 그것이 시지프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간적인 존엄일 수 있습니다.
5. 죽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대적 운명
그리고 마침내, 시지프스의 돌처럼 영원할 것 같은 우리의 삶에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어떤 인종이든 어떤 신념을 가졌든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이 냉엄한 사실 아래 평등합니다. 시작은 제각각 달랐을지 몰라도, ‘죽음’이라는 종착점은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운명은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현실임을 증명합니다.
결론: 운명을 직시하는 용기
운명은 미신이나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주어진 조건들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입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운명의 흐름 속에서 시지프스처럼 때로는 부조리해 보이는 과제를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때로는 운명의 경로를 바꾸는 강력한 우연을 만나기도 하고, 뇌라는 복잡한 시스템을 통해 ‘선택’이라는 과정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우연이라는 1%의 희망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희망마저도 거대한 운명의 틀 안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처한 상황, 나의 한계는 상당 부분 나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시지프스처럼, 운명을 직시하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인간적인 존엄을 지키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삶을 결정짓는 운명의 힘을, 당신은 어떻게 마주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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